[Seminar] 당신이 옳다

2019. 4. 23. 18:15Review

 

2019.4.23 

KAIST 양승택 오디토리움

 


 

지옥에 빠진사람도 구해낼수있는 힘은

공감이다.

흔해빠진 공감이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모든 인간은 다르다.

어떤 한 존재가 또다른 한 존재를 비로소 만나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이란 나와는 개별적인 존재를 민낯의 그 존재 자체로 만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공감을 하는순간

나와 다른 개별적 존재가 자동으로 지옥에서 꺼내올려진다. 

 

 


 

ex)

어느날 학교에서 심리검사를 했고, 한 아이는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그 아이의 집에서는 엄마 아빠 사이 갈등이 있고, 아이가 정서적으로 여러가지 결핍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그 아이의 심리 상태를 보았을 때, 자살충동뿐만 아니라 그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2주간 부모는 그 아이에게 문제를 물어보고,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졌으며

같이 병원에 가서 정밀한 진단을 받았다.

그 아이에게는 "약물치료를 해야한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아이는 이후에 "병원 안가. " 라고 말한다. 

약물치료를 시도해야하는데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약물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아이를 2년동안 애를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부모들도 함께 심리센터에 가서 검사하고, 오랜만에 부모역할을 했다는거에서 죄의식도 덜었겠다,

그리고 아이도 싫어하니 어쩔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이의 심리상태가 점점 좋아지더니, 몇달후에 치료없이 저절로 좋아졌다고 한다. 

병원 상담을 받을 때, 부모님의 눈물이 핑 도는걸 아이가 봤고,

그 때 "내가 부모님에게 아무존재가 아닌게 아니였구나" 라는걸 느꼈다고 한다.

 

존재가 존재가 서로 마주하고 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것

그게 아이를 지옥에서 꺼내올려주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우연한 매체(병원에 함께가서 검사함)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이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존재가 존재에 눈을 떼지않고, 그 배후의 고통에 집중하고 주목하고.

그 상대의 고통에 함께 출렁이고 있는것.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실체다.

 

고통에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눈을 맞추고 같이 동참하고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람을 구하는 모체이고, 사람을 살리는 8할 이상의 힘이다.

 

 

 


 

ex) 

특정 한 사람에게 악의를 품고 35년동안 스토킹을 하는 스토커가 있다.

그 스토커가 병원에 방문해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나는 35년을 한사람을 아주 절박하게 쫒고 있다. 

그 사람은 과거 나를 고문하고,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고문 경찰관이다. 

나는 그사람을 잡으면 단칼에 죽이지않겠다.

서서히 죽여가면서 인간이 느낄수있는 고통을 다 느껴봐야 한다

그 인간은 마지막피한방울까지 서서히 모든고통을 느끼면서 죽어야한다 그사람을 포를 뜰 것이다"

 

평생동안 꺼내오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일생 처음 말한 것이다. 

그러더니 저자와 눈을 마주치더니 펑펑 울기 시작한다. 

 

"이 생각을 하면서 35년을 살았어요. 저는 괴물이에요."

하지만 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일생을 고통스럽지 않게사는것. 그게 어찌 괴물이냐.

다음주에는 그 복수, 꼭 성공해라."

 

이후 다음주부터 그 사람은 복수를 드라마틱하게 그만두고 ,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우울증때문에 잠을 못자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약도 다 끊었다. 

공감을 하면 상대방을 지옥에서 구할 수 있다.

이 때, 저자는 그사람에게 온 체중을 다해서 공감을 한 것이다.

"그 사람을 죽여서 포를뜨고싶어요" 라는 아픔의 실체와 그 존재. 그 실체가 나올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이런 말이 나왔을때 진정한 치유는 "안된다. 그만둬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 그랬구나 그럼마음이었구나" 라고 동참하는 것이다. 

 

한 개인을 민낯으로 만나기 위해서.

구체적인 상황을 만나기 위해서.

아픔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질문한 후

실체가 나왔을 때

"그럴만큼 억울하셨군요 그럴만큼 무기력하셨군요. "

이렇게 말하는 것.

이게 별거 아닌것같아도 사람 목숨을 살리는 말이다. 

 

한 존재의 핵심을 만났을 때

하나도 토를 달지않고 어떤 판단도 하지않고 어떤 조안질이나 충고질도 하지 않고

그 존재의 핵심이 나올때까지 묻다가 존재가 나오자 "아 그랬구나" 하며 수용하는 것.

사람이 자기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은 가장 합리적인 상태가 된다.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현명해진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했을때, 눈물 핑 도는건 단순한 감정적 동요다.

감정이라는건 휘발되서 없어질수도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이것을 이해하고 "그랬구나"라고 할 수 있는것.

그게 공감이다

 

이해할 수 있는만큼 하는것이 공감이다.

이해하는 만큼 하는게 공감이다.

 

이해 없이 "그래 너가 옳아" 라고 하는것은

감정노동이다. 단지 공감 코스프레이며, 이는 오래 가지 않는다. 

 

공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고,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이유가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잔인한 것은 나도 아직 모른다. 그런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마음을 가지며 계속 물어보고, 알게되고, 또 아는만큼 물어보며

최종적으로 아는만큼 할 수 있는게 공감이다.

 

 

 

 


 

ex)

쌍용차 노동자들은 10년동안 회사와 투쟁한다.

그 동안에, 노동자들의 아내도 자살하고 자녀들도 힘든데, 왜 10년동안 투쟁을 하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차라리 그 10년동안 막노동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10년동안 바보도 아니고 납득할수없는 일을하냐?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왜 그러는건가요?" 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들 중 한명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 아내와 아들이 현장에서 경찰에게 내가 구타당하는것을 봤다.

아직도 자녀가 경찰만 보면 도망간다.

아들에게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구타당한 것이 아니라는걸 입증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연을 듣게 되면, 

"사람이 억울한 일을 겪으면 저렇게 반응할수 있겠구나. " 라며 이해하게 된다. 

이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저 귀족노조. " 라고 규정하고 나는 이미 알고있다고 생각한 채로

그들에게 묻지 않으니까 내가 이해할수 없는 것이다.

공감은 감정 노동이 아니다. 

"보살이십니까? 어떻게참아? " 라고 사람들이 물어볼 수 있는데,

공감은 참는 것이 아니다.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은 "물어봐서" 그런것이다. 

듣다보면 이해할수있는만큼 공감을 하게된다. 

물어보면 항상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저런생각까지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내가 개입을 적게 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방도 좋고, 나도 불필요한 에너지를 안 쓸수 있다.